1999년12월 3일 (금) 부산 사나이 대한민국

금요일 저녁은 아내가 강의를 하러 나가고 누나들은 학원에 가기 때문에 항상 3부자가 진한
관계를 갖는다. 지난 주에는 바닷가에서 바람을 쏘이다가 부산역 근처에서 지나가는 기차 구경
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녀석들 몸이 안 좋다. 낮에 병원에 와서 진찰을
받고 약을 받아 갔다. 퇴근하면서 아내와 임무교대할 때에는 늦은 낮잠, 아니 이른 저녁잠을
자고 있었다. 아침부터 벼뤘던 목욕탕에서의 허물없는 교제의 계획이 무산되자 김이 빠지는 듯
했다. 아내가 나간 뒤 살짝 흔들어 깨워 보았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한잠이 들었나 보다. 아이
들 옆에서 누워 책을 뒤적이다가 나도 얕은 잠이 들었다. 8시쯤, 뒤척이던 한이가 벌떡 일어
나더니 내게 안겼다. 잠시 한이와 자동차 놀이를 하는데 국이가 일어 났다. 국이 녀석은 일어
나는 즉시 인상을 찌푸리면서 엄마를 찾았다.
"야 우리 빵빵 카 타고 엄마 가자." 두녀석이 동시에 환하게 웃으면서 벌떡 일어나더니 겉옷을
하나씩 들고 왔다. "추운데 옷 입고 가자." 두툼한 외투를 가져 와서 입혔으나 국이는 갑갑하
다고 입지 않으려고 했다. 옆에 있던 한이가 "춥데이." 한이가 다시 말한다. "국기야 춥데이."
국이에게 옷을 입히는 사이에 한이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신발이 제대로 신겨지지 않은가 끙
끙거린다. "신발 신거 안 진다." 어순도 맞지 않는데다 액센트가 완전 안동 양반 아빠를 빼닮
았다. 외모는 왕자 같은데 왜 이리 말이 투박하냐? 속웃음이 나왔다.
차에 타자, 한이가 "아빠 땡기라." "뭐?" "아빠 땡기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이 얼

굴 표정과 몸짓을 보니 조수석을 앞으로 당겨라는 말이었다. 조수석을 당겨 주었더니 얼굴이
확 펴진다. 출발했다. 송도를 지나는 길의 신호등에 차가 멈추자 녀석들이 언제 말을 배웠는지
"신호 바끼있다." "그래 신호 바끼있다." 두녀석 모두 '낐'에 액센트를 주었다. 그 잠깐의 기다
림에 지쳤는지 "아빠, 신호 바까아라.(바꾸어라)" 빨리 출발하란다.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엄마를 만난 두 녀석은 좋다고 괴성(?)을 질렀다.
"여보 이 놈들 말투가 왜 그래요. 나 닮지 않게 할 수 없어요?"
"대한민국이는 부산 싸나입니다. 뿌라 뿐데이(부러뜨리겠다.) 던진데이. 다른 방도가 없어요. 그
래도 밥 머언니껴(밥 드셨습니까?), 잘 잔니이껴(잘 주무셨습니까?) 하는 아빠 보다야 낫죠. 한
국이는 부산 갈매기 투박한 멋쟁이 싸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