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2월 5일 (토) 세배없는 한국이의 설

어제부터 설 연휴는 시작되었으나 쌓였던 피로가 동심으로 돌아 갈 여유 마저 나에게서 앗아
갔고 아름이와 다운이는 전날 밤 늦게까지 영화를 감상하더니 잠에서 깨어나기가 힘든가 보다.
아침 식사 후 부터 구미에 계시는 형님댁으로 갈 준비를 하는 아내의 손길은 바쁘지만 대한이
와 민국이는 엄마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요구가 많다.
"엄마 쥬스, 엄마 귤, 엄마 쉬, 엄마, 엄마,,,,,"
아내의 준비를 돕는 길은 이 녀석들과 목욕하는 것일 것 같아서 목욕통에 물을 채우고 세부자
가 함께 들어 갔다. 적중했다. 아내가 한국이로부터 한 시간은 넉넉하게 해방되었다. 떠나기 전
다운이는 한국이에게 세배를 가르쳤다. 무릎은 굽히지 않았지만 엉덩이를 쳐들고 이마를 땅에
대는 것이 절을 제법 하는 것 같다. 저 정도면 내일 세배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나서는데 하루밤 지낼 여정의 가방이 크게 느껴졌다.
"뭐 그리 짐이 많소? 간단히 준비하지 않고요."
"아무리 간단히 해도 기본이 있잖아요? 그래도 지난 추석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녜요. 우유
병, 기저귀 없으니 가방이 푹 줄었네요. 이 녀석들이 효도를 하는 거예요."
자동차에 탄 식구들은 즐거운가보다. 출발 기도의 아멘 소리가 크다. 특히 한국이는 소리 정도
가 아니라 고함에 가까왔다. 새로 마련한 CD기에 6장의 찬양 CD를 장착하여 듣는 아름이와
다운이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명절 고속도로는 길고도 길게 늘어졌다. 세시간이면 닿을 수 있
는 길이 배로 늘어 졌다. 그래도 해가 있을 적에 도착한 것이 다행이었다. 길가까지 나와서 기

다리시는 형님 내외분이 반갑고 고맙다.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조카가 근처에 온천이 새로
생겼으니 가잔다. 피로도 풀겸 온천을 향했다. 엄마를 두고 떠나는 한국이가 쉽게 응하지는 않
았지만 사탕 한 개로 마음을 금새 돌릴 수 있었다. 아침에 이은 저녁 목욕이지만 한국이는 즐
겁게 목욕탕으로 따라 들어 왔다.
설 아침 정성스런 음식을 맛있게 먹고 세배를 할 시간이 되었다. 한국이보다 4개월 앞선 윤식
이는 세배할 낌새를 차리고는 급한 마음에 엉덩이를 쳐들고 세배를 하고 또 한다. 옆에 있던
다운이가,
"한아, 세배 해봐. 어제 배운대로 말야. 이렇게 하면 돼. 해봐."
그러나 한국이는 끝내 세배를 하지 않았다. 엄마 품에 안겨 손가락만 빨았다. 암된 녀석들이
내 마음 처럼 세배를 하기에는 열댓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많은가 보다. 세배를 받기 위해서 또
다시 한해를 기다리자.
세배 후 다과를 나누는데 아내와 조카 며느리 둘, 나와 조카 둘은 한 세대가 되어 봄이면 시작
되는 유치원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유아용 TV 프로까지 나이의 벽을 넘어 선 한 세대의 부
모로서 정보를 주고 받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